① 신라 8대 아달라왕릉(阿達羅王陵)

서기 154년에 아버지 일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서 지금의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에 처음으로 길을 내고 영일현(迎日縣)을 설치하는 등 안정된 상태에서 나라를 

경영하였다. 백제군이 쳐들어와 수많은 백성들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다시 데려 오기도 하였다. 30년 간 왕위에 있다가 서기 183년에 돌아가시자 이곳에 

장사(葬事) 지냈다.

② 신라 53대 신덕왕릉(神德王陵)

아달라왕의 23세손으로 서기 912년에 효공왕(孝恭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 박씨는 아달라왕의 원손(元孫)이다. 시조왕이 

인덕정치(仁德政治)를 하신 덕으로 지금에 그 후손이 다시 왕이 된 것이다] 하였다. 전(傳)하는 바로는 동해의 용왕(龍王)이 옥(玉)으로 만든 피리 한 쌍을 바쳤다고 한다. 

재위(在位) 5년 후인 서기 917년에 돌아가시니 이곳에 장사(葬事) 지냈다. 


③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陵)

아버지 신덕왕(神德王)의 뒤를 이어 서기 917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때는 벌써 국운(國運)이 기울어 가는 시기(時期)였다.

고려(高麗)가 개국(開國)하고 후백제(後百濟)가 서쪽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한 형세(形勢)임에도 퇴치(退治)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전국에 걸쳐 왕명(王命)의 시행(施行)이 어려워지자 할 수 없이 고려와 동맹(同盟)을 맺었으나 후백제의 침입(侵入)을 막기에도 힘이 벅찬 때였다.

그러나 아홉 명의 아들을 두어 각 지역(地域)에 분봉(分封)하였는데 후일 분봉 받은 지역을 연고(緣故)로 박씨의 분관(分貫)이 이루어졌다.

재위(在位)7년이고 서기 924년에 돌아가시자 이곳에 장사(葬事) 지냈다.

세 왕릉 모두 매년 추분(秋分)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세 왕릉 모두 매년 추분(秋分)에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