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의 55대 임금인 경애왕(景哀王)은 서기 924년에 형님인 경명왕(景明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나라의 형세가 완전히 기울어 왕명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주(州)의 수령(首領)들은 

다스리던 땅을 바쳐 고려(高麗)에 항복(降伏)하고 서쪽을 차지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은 자주 국경(國境)을 침범(侵犯)하니 

나라의 형편은 그야말로 위급(危急)한 지경에 있었다. 

서기 926년에 후백제 왕인 견훤이 왕도(王都)까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려에 구원(救援)을 청했는데 

미처 구원병(救援兵)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경주에 도착한 후백제 군이 포석정(鮑石亭) 부근 재궁(齋宮)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던 

경애왕을 공격(攻擊)하니 급히 왕궁(王宮)으로 피신했으나 추격해서 왕과 왕비를 찾아낸 견훤(甄萱)은 

왕에게 군중(軍中)에서 자진(自盡)토록 강요(强要)하니 할 수 없이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한편 곧바로 신라를 구원하러 왔던 고려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지금의 대구(大邱) 팔공산(八空山)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패하고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충장(忠壯) 신숭겸(申崇謙)이 대신 죽고 간신히 살아 돌아가기도 하였다.

경애왕이 자결한 후 왕비와 왕자, 높은 신하(臣下)들이 후백제에 포로(捕虜)로 잡혀가고 수많은 보물(寶物)들을 빼앗긴 것을 생각하면 

국방(國防)이 얼마나 중요(重要)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에서는 후사(後嗣)가 없는 경애왕의 제향(祭享)을 중앙청년회(中央靑年會)에 맡겨 매년 추분(秋分)에 올리고 있다.